책 수선의 가치
책 수선의 가치
고치면 값지다.
이케아에서는 최근 소비자가 사용하던 중고 가구를 매입해 수선한 후 다시 판매하는 바이 백 프로그램Buy Back
Program을 시작했다. 쓰던 가구를 가져가면 상태에 따라 상품권으로 보상해준다.
가성비가 뛰어나 사랑받는 브랜드로 알려져 있는 이케아가 지속 가능성의 확보를 위해 ‘수선’의 방식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얘기가 좀 다르다.
이케아에는 매입한 가구를 수선이나 수리하기 위한 제대로 된 수선실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선을 많이 해야 하는 가구는 매입하지 않기 때문. 가능한 한 수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중고품만
을 매입한다는 얘기다. 기업이 경제적 가치와 효율을 따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책 수선’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도 가장 먼저 떠올린 것 역시 바로 이 가치와 효율이다.
보통의 경우 책을 수선하는 것은 책이 가진 내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투자 측면에서 보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책을 수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가 된다.
초판본 등 오래된 책을 수집하는컬렉터에게도 (복원이 아닌) 수선은 가치를 훼손하는 쪽에 가깝다.
예술 제본가인 이보영 작가 역시 책 수선을 의뢰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정서적인’ 것이라고 본다.
“책을 소유한 사람에게 추억과 시간이 담겨 있으니 새것으로는 대체하기 어렵죠.
망가진 책을 온전한 상태로 복구하면서 심리적으로 위안을 얻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라고 생각해요.”
프랑스에서 예술 제본을 공부하고 돌아와 제본 아틀리에를 운영하는 그는 프랑스에서 도서관마다 제본가와 계약
하고 책 수선을 맡기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작업이 필요한 때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귀국하고 3년쯤 지났을 무렵 한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외서들의 수선을 제게 의뢰했어요. 도서관 사서가 올해
집행해야 할 예산이 어느 정도 남았는데 써야 하니 책을 보수해달라고 하더군요.”
도서관에서 전문 제본가에게 수선을 의뢰할 정도의 책이라면 일반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소장용으로 보험에 가입
해 있기도 한, 앞으로 잘 보존해야 하는 대상이란 뜻이다.
개인이 수선을 의뢰하는 책은 ‘사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점에서 도서관의 책과는 다르다.
“꽤 큰 비용을 들여서 책을 수선하기로 마음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고,
소유한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책은 굉장히 사적인 물건이잖아요.
그게 제게 전달된 것이니 아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기분이 들어요.”
물건은 소유한 사람의 사소한 동작이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특히 책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망가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책을 읽는 사람이나 책을 사용하는 사람의 손을 타면서 망가진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
만 처음 외국어를 배울 때 들고 다니던 사전이나 성경처럼 종이가 얇고 무거운 책들이 나중에 어떻게 변했는지 떠
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신발 뒤축이 닳은 상태를 보고 걸음걸이를 예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굳이 물어보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정보들이 있어요.
그래서 더욱 개인적인 사연이 담긴 책은 조심스럽게 작업하게 되고요.”
요즘에는 할머니의 오래된 일기장을 수선 중이다. 장성한 딸이 대신 의뢰한 작업이다.
할머니는 일기를 부끄러운기록이라며 굳이 책으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의뢰인인 딸은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고급 장정으로 수선해달라고 부탁했다.
대학 노트에 담겨 있던 한 개인의 일기가 책으로 엮이는 순간 그것은 가족의 기록으로 남게 된다.
제본가는 거기에 조력자로 참여하는 것이다.
한번은 한 어머니가 다 뜯어져서 낱장이 되다시피 한 동화책의 수선을 의뢰한 적이 있다.
1만원이면 똑같은 책을 다시 살 수 있는데도 그 10배의 비용이 들더라도 수선해달라고 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자신의 아이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이 책만 반복해서 보고 다른 책은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책을 수선해 택배로 보내드렸더니 사진을 보내왔어요. 아이가 책을 끌어안고 좋아하며 읽는 모습이었어요.
이 일로 인해 제가 하는 작업은 많은 대중을 상대로 수요를 찾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필요를 채우고
작은 감동을 전하는 작업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