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하는 수선
좋아서 하는 수선
덕후가 세상을 이끈다.
H&M 같은 대표적인 패스트 패션 브랜드도 앞서서 대응 전략과 보고서를 내놓을 만큼 패션 산업에서도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은 중요한 화두다. 기후 친화적(Climate Positive)이라는 전략을 세우고
제품당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목표까지 설정해뒀지만, 사실 의류의 생산은 물론 판매와 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급적 생산을 하지 않는 것이다.
소비자는 덜 사고, 일단 산 옷은 버리지 않고 오래 입는 것이 참여하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역시 불가능(혹은 고문)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트렌드를 좇기보다는 클래식을 내세우고 한 번 사면 대를 물려 입을 수 있다는 점을 마케팅 전략으로 삼은
바버Barbour 같은 브랜드는 뜻하지 않게 지속 가능 패션의 선구자 대접을 받게 됐다고 할 수 있다.
1894년 영국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맞서 어부와 선원들을 위해 왁스 가공을 한 방수 원단으로 만든 재킷을 세상에 내놓으며
시작된 바버의 역사는 그래서 미끈거리는 왁스를 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1970~80년대에 완성돼 바버의 클래식이 된 비데일Bedale이나 뷰포트Beaufort 같은 재킷들 역시 왁스가 입혀져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이 왁스가 점차 사라져서 본래의 기능을 잃게 돼 리왁싱을 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패션을 위한 관리가 필요한 옷인 셈이다.
‘바버아저씨’라는 이름으로 문승정 대표가 하는 일은 바로 이런 왁스 재킷에 새로 왁스를 도포하는 수선 과정을 통해
입을 수 없게 된 옷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바버 재킷의 공식 판매원에서도 제공하지 않는
이런 서비스를하는 이는 국내에서 그가 거의 유일하다.
“고등학교 때 영화에서 헌팅 재킷을 보고 반했는데,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폴로 매장에서 산 헌팅 재킷이 왁스 재킷이었어요. 판매 직원이 세탁할 수 없는 옷이라고 말렸는데,
네이비 색상에 가죽 느낌으로 왁스가 은은하게 입혀져 있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샀다가 왁스 재킷 마니아가 됐어요.”
20년 전일이다. 세탁소에 맡겨 드라이클리닝이라도 했다가는 옷을 망치게 되니 왁스라고 할 만한 것들은 다 구해다 발라
봤다.
초를 녹여서 발라보기도 하고 해외 사이트에서 파는 왁스를 구해서 발라보기도 했지만 결국엔 옷을 망쳐서
재활용 수거함에 넣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당시에는 바버라는 브랜드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대학생이 된 후에야 인터넷에서 사진 속 영국 왕세자가 입은 것이 바버 재킷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중고 바버 재킷을 사고, 마음에 들어서 가족들 것도 하나씩 사다 보니 왁스 재킷만 수십 벌에 이르더라고요. ”
출퇴근할 때라도 멋을 내고 싶어서 왁스 재킷을 열심히 사 모았지만
한 달 내내 자정 무렵에야 집에 돌아오는 야근을 견디기 어려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자’는 생각에 퇴사하고
개인 작업실을 마련한 것이 2016년의 일이다. 건축설계사무소에서 건축사를 꿈꾸며 일하던 왁스 재킷 마니아가
왁스 재킷 수선점을 열었지만 처음부터 이 일로 돈을 벌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설계 도면 작성 아르바이트와 인테리어 시공을 병행하며 리왁싱 서비스를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제가 가진 왁스 재킷에 약품 처리를 하거나 왁싱을 해보는 것이 취미였어요.
좋아하는 옷을 오래 입고 싶었거든요. 테스트를 거듭하다가 원단이 상하지 않게 왁싱하는 방법을 찾아낸 터라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판매처에서 왁싱 서비스를 하지 않지만 영국과 미국, 일본에서는 리왁싱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영국과 일본, 이탈리아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전문 숍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오픈 초기에는 바버라는 브랜드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왁스 재킷도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옷이어서 서비스 의
뢰가 많지 않았어요. 당시 제가 하는 일의 20~30%에 불과했는데, <킹스맨>이라는 영화에 왁스 재킷이 등장하면
서 바버 재킷이 알려지기 시작해 지금은 제 일의 60% 정도로 수선 의뢰가 늘었어요.”
리왁싱 서비스를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버 매장에서 고객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SNS에 바버아저씨의 서비스에 대한 긍정적인 소감을 남겨준 고객들 덕분에 알음알음 의뢰가 늘었지만
수선 서비스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이베이 등을 통해 빈티지 바버 재킷을 구매하거나 셀프 리왁싱을 시도했다가
망친 뒤에야 그에게 서비스를 의뢰한 고객 대부분이 새것에 가까운 상태로 바뀌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컴플레인을 여러 차례 겪고 새옷으로 보상해주는 손해를 보면서 회의도 느꼈지만,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직접 기계를 제작하기도 하면서 슬럼프를 극복했다.
“가끔 할아버지들이 젊었을 때 해외 출장길에 구매해서 입다가 세탁을 잘못해서 망치고도 아까워서
못 버린 버버리나 입생로랑 같은 명품 브랜드의 왁스 재킷을 맡길 때가 있어요. 세월의 때가 잔뜩 낀 옷을 깨끗하게
만들어 보내드리면 고맙다고 커피 쿠폰 같은 걸 보내주시기도 해요. 그럴 때 이 일을 하기 참 잘했다고 생각하죠.”
왁싱과 관련한 기술적인 문제는 자신 있게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됐지만 찢어지거나 구멍 난 재킷 수선은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제조사에서 오리지널 원단을 제공하지 않고 영국에서도 기본적으로 패치워크를
권장하는데 우리나라 정서에는 맞지 않는 수선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비슷한 원단을 찾고 있고, 패치워크를 어떻
게 하면 고객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지 고민 중입니다.” 이렇게 덕후는 수선의 세상도 바꿔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