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우리 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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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우리 쌀이 있다

몸과 태어난 땅이 하나이니 제 땅에서 난 것이라야 체질에 잘 맞는다.

<동의보감>의 ‘약식동원론’에 나오는 신토불이 얘기다.

유행도 지나고 이제는 너무 흔한 말이지만 토종벼에는 여전히 유효하다.



최근 브랜딩 전문 회사인 필라멘트앤코가 성수동에서 운영하는 전시 공간 ‘프로젝트 렌트’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열렸다. 쌀, 그것도 우리 토종벼에 관한 전시다. 그간 관심 받지 못했던 토종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반향은 제법 크다. 그것이 브랜딩의 힘일지라도 이번 전시는 우보농장 이근이 대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제가 우리 땅에서 나는 벼의 품종을 조사해 정리한 <조선도품종일람>이란 책을 보면 당시 벼 품종이 1천4백51종이라고 나와요. 그런데 일본이 식량을 수탈하기 위해 수확률이 좋은 벼를 심으면서 대부분 사라졌고 그 이후에는 1970년대에 통일벼를 심으면서 자취를 거의 감췄어요.”


지금 남아 있는 것은 4백50종이다. 그가 처음부터 토종벼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텃밭 농사로 시작해 밭작물 중심으로 농사를 짓다가 7년이 지났을 무렵 토종벼를 알게 됐다. ‘단순한 호기심’에 30여 종의 볍씨를 모아 임대한 농장 한구석의 3평짜리 땅에 심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처음 수확한 볍씨로 이듬해에는 3천7백 평의 땅에 토종벼를 심었다. 이 마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벼에 대해 알아야 한다.

“벼는 1천 배로 증식을 해요. 많은 것은 3천 배까지도요. 씨앗을 심어 모가 자라면 가지벌이라는 걸 해요. 평균적으로 한 알에서 10개 정도의 가지벌이를 하면 가지 하나에 이삭 하나가 맺히는데 한 이삭에 낱알이 보통 1백20개에서 1백50개가 열려요. 그러니까 볍씨 하나에 1천2백 개에서 1천5백 개가 나온다는 얘기죠.”


토종이란 품종이 고유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 땅에 적응해서 고정화되는 것. 외국에서 왔더라도 적응해서 고정되면 그것을 토종이라고 부른다. 원산지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벼도 처음부터 우리 땅에서 난 것은 아니니 한 지역에서 수십, 수백 년에 걸쳐 똑같이 자라난 벼라면 그게 토종벼가 된다.

“농부는 자신이 키우는 작물을 늘 유심히 살피고 변화를 찾아봐요. 가령, 벼를 심었는데 낱알이 무지하게 많이 달리는 특정한 벼가 생겼다면 그걸 모아놨다가 다음에 다시 심어보고, 그때도 낱알이 많이 달리면 그 과정을 반복해요. 자연변이는 몇 개에만 나타나거든요. 확률이 100%가 되는 시점에 고정화됐다고 보는 거예요.”


항상 똑같은 벼를 심고 기르는 과정을 반복하던 와중에 나타난 변이가 다른 종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농부의 취향도 반영된다. 가령, 키가 큰 벼는 전형적으로 농부의 취향이 개입된 경우다. 긴 벼는 볏짚만  쓰거나 볏짚으로 일상에서 필요한 도구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국가기관이나 종묘 회사에서는 특정 종자의 좋은 면만을 유전적으로 교배해 개량종을 만들어낸다. 수확량이 많거나 병해충에 강한 개량종은 수백 가지가 넘는다.

“저도 처음에 30종의 볍씨를 받았을 때는 전혀 구분하지 못했어요. 별 기대 없이 심었는데 서로 다른 벼가 나오고 그다음에 심어도 똑같이 나오니까 신기하고 흥미롭더군요.”


최초로 토종벼를 조사한 것도 일제강점기였지만 사라진 것도 그때다. 일제가 식량 수탈을 위해 개량 품종을 심었으면서 토종벼는 도태됐다. 최소의 거름만으로 벼를 자연적으로 키우는 전통 농법과 달리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화학비료를 쓰고 거름을 많이 주는 방법이 이때부터 사용됐다. 키가 커서 쓰러질 위험이 높은 벼는 제외하고 대신 키가 작은 벼를 선택하면서 토종벼는 사라지게 됐다. 추청秋晴이라고 불리는 아키바레는 비료에 길들어 비료를 안주면 수확량이 떨어지지만 토종벼는 야생성이 강한 대신 화학비료나 농약에 특히 취약하다. 유기농법으로 키울 수 밖에 없다. 효율을 중시하면서 농부가 자신이 키우는 벼에 대해 하나하나 관심을 갖고 알아가는 과정이 무의미해 지고 벼의 품종은 선택지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됐다.

그렇다고 이근이 대표가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토종벼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생물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차원이냐고 물었더니 전혀 아니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이유의 전부다.

“벼 종자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없어요. 등 떠밀려서 하는 것도 아니고요. 키우다 보니 각각의 특징이 명확하게 드러나면서 재밌더군요. 어디까지 가나 보고 끝내자 하는 생각이에요.”






대중문화 비평지 <리뷰> 편집장, 대중문화 웹진 <컬티즌> 대표를 지내고 음반 레이블을 만들어 음반을 제작하는등 문화판에서 오래 일한 그가 농사에 빠져든 것은 매번 새로운 씨앗을 통해 순환하는 삶을 발견하는 놀라움과 즐 거움 때문이다. 씨앗마다 계절마다 겪게 되니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스스로를  ‘농사 덕후’ 정도로 생각하는 그가 그렇다고 단순히 각각의 다른 씨앗이 주는 재미만으로 토종벼를 좇는 것은 아니다.

“결론은 역시 맛이에요. 맛이 다 똑같으면 재미없어서 안 했을 거예요. 3천7백 평의 땅에서 처음 쌀을 수확한 해부터 테이스팅 워크숍을 했어요. 제가 이런 일을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셰프나 토종쌀을 가져가 판매하는 마르쉐 같은 장터에서 알게 된 분들과 함께 맛보는 거죠.”


농부들과 기자들을 부른 뒤 북극조, 버들벼 등의 쌀 7종을 가지고 똑같이 도정해 같은 조건으로 밥을 지었다. 결과는 예상을 벗어났다. 밥이 밥이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각각의 밥맛과 그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토종벼별로 맛의 다양성을 확인했다. 미세하지만 밥맛의 차이를 알고 나서는 키워볼 만하구나, 복원해볼 만하구나를 넘어서 이 재미있는 일을 그동안 왜 안 했지 생각했다. 재미의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계속 새로운 토종벼를 찾아서 모으고 심기 시작했다. 올해도 20종의 토종벼를 심는다.

“맛으로  영역을 넓히니까 흥미로운 게 정말 많아졌어요. 2011년에 처음 시작한 테이스팅 워크숍을 이제는 1년에 7~8회 하는데 기업에서 요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와 뜻이 맞는 셰프들도 새로운 쌀을 사용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품종을 더 심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해요. 거기서부터 가능성이 다시 열리는 것이죠.”


토종벼는 지금 이 단계까지 와 있다. 그렇다고 토종벼 농사를 규모화하기는 어렵다. 품종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수확량이 많이 나오지 않기도 하고 돈이 되는 농사가 아니기 때문에 지역 농부들에게 권하기도 어렵다. 자신들의 할 아버지, 할머니들이 드셨을 것이라는 역사성을 생각해 그 지역에서 재배하던 씨앗을 제공하지만 상품화까지는 요원하다. 전국에서 버들벼와 돼지찰이란 벼로 두 농가가 상품화에 성공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 역시 백화점이나 마트를 통해 유통하기에는 불가능한 수량이다. 전통 농법의 특성상 모든 것이 수작업이어야 하고 유기농이다 보니 현재의 쌀 가격으로는 어림없다.

이근이 대표는 자신의 역할을 거기까지로 생각한다. 나머지는 농부 각자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막걸리입니다. 토종쌀로 만든 엿이나 조청, 아이스크림에 도전하는 분도 있지만 전 농부 입장에서 그리고 쌀 문제 해결과 관련해서 막걸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1907년부터 1935년까지 우리나라 주류업에 관한 일제의 공식 기록을 편역한 <조선주조사>를 보면 당시에 존재한 주막의 수를 12만 개로 기록하고 있다. 엄청난 숫자다. 주막마다 자신들이 팔 술을 담갔을 테니 과거 우리나라에는 막걸리를 기본으로 한 굉장히 발달한 술 문화가 존재했다는 의미다. 이근이 대표가 막걸리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문화’ 때문이다.

“주막이 많을 때는 30만 개도 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담그는 사람도 술을 발효시키는 미생물도 달랐을 테고, 무엇보다 지역마다 쌀 품종이 달랐을 테니 엄청나게 다양한 맛의 막걸리가 존재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어요. 인류 역사상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한 술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테이스팅 워크숍이 끝나면 항상 토종벼로 담근 막걸리를 시음하는 행사를 갖습니다. 도수가 13~15도 정도 되는 막걸리마다 가진 맛과 향의 차이를 느껴보는 것이죠. 그 재미가 또 굉장합니다.”


아직 토종벼가 자리 잡아가는 중이지만 이근이 대표는 지금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국내용인 전국 토종벼 농부대회의 규모를 키워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는 세계 토종벼 농부대회로 열어보고 싶은 것이다. 해외에 우리 토종벼를 알리고 싶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토종벼를 알리는 과정에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몇 나라의 농부들과 인연이 닿았고 이미 기획하는 중이다. 잠실운동장 같은 넓은 공간을 빌려 세계 곳곳의 벼 이삭을 한 번에 걸어서 전시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얘기하는 그의 음성이 갑자기 한 톤 높아졌다.

“이 벼들이 어딘가에 심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농부 중 누군가가 키우고 소비자에게도 이런 벼를 가공하면 이 런 맛이 난다고 알리고요. 어떤 품종이 뜨고 살아남을지는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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