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는 시간

MAGAZINE / JOURNAL



익는 시간


평생을 이어온 양조자의 시간은 멈춘 적이 없다.



열매가 익어가는 늦여름의 귤나무가 마을 어귀부터 빼곡하다. 그 너머로 뜨거운 태양 아래 구불구불 이어진 농가의 돌담 안에서 초록 과실이 열심히 익어가는 중이다. 제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귤나무지만,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의 귤은 그중 최고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 마라도 다음으로 남쪽 해풍을 먼저 맞는 신례리는 감류 나무를 최초로 재배한 마을이자 제주에서 감귤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이다.


드문드문 보이는 ‘감귤마을’이라는 푯말을 지나 노란 글씨로 ‘혼디酒’라고 쓰인 건물에 다다른다. 신례리 감귤로 증류주를 만드는 양조장이자 술이 익어가는 숙성 창고다. 귤밭으로 둘러싸인 건물에 들어서자 효모 향이 코끝을 날렵하게 휘감는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등장한 이용익 선생(69)은 마른 몸피에도 단단한 체구를 지녔고 허리가 꼿꼿하다. 웃음기 없는 얼굴과 선명하고 깊은 주름 때문에 얘기하는 중에도 뭔가에 골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차분한 존재감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의 손에 백과사전처럼 두툼한 스프링 노트가 들려 있다. 원료, 포장재 등의 비용부터 감귤 증류주 제조 공정 같은 중요한 정보까지 손으로 일일이 적은 기록이 빼곡하다.


“시행착오를 하지 않으려면 기록이 참 중요해요. 그런데 1975년부터 20여 년간 매일같이 쓴 업무 일지를 부하 직원이 공장을 정리한다고 버려버려서 그게 제일 아쉬워.” 컴퓨터에도 기록을 남기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일지를 쓰고 수정하고 공유하는 일은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과 중 하나다.


선생은 주류업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소문난 전문가다. 40년 넘게 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한길을 달려왔다. 1975년 ㈜하이트진로의 전신인 조선맥주주식회사에 공채 1기로 입사해 2000년대 초 은퇴할 때까지 진로 주류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은퇴 후에는 주류업체를 상대로 컨설팅을 하다가 제주에서 양조 전문가로 일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고민 없이 제주행을 택했다. 그의 나이 일흔을 목전에 둔 2015년의 일이다. “서울대학교 농화학과 재학 시절 ‘개척농사단’이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거든. 농촌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사명을 품고 살았지. 제주에서 늦게나마 개척농사단의 이념을 구현하고 싶었던 거지.”


제주에 내려와 농업 회사 법인 시트러스에 합류해 4개월 만에 감귤 발효주인 ‘혼디주’를 출시했고, 1년 후에는 50도 증류주인 ‘신례명주’를 내놓았다. 오크통에 1년 이상 숙성한 감귤 브랜디다. 그 전까지 시트러스의 신제품 개발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었다. “전문가가 없었던 거죠. 이름만 그럴듯한 연구소 위원들이 말로만 술을 개발하니 좋은 술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례명주는 제주감귤연구소에서 개발한 특허 효모를 저온에서 장기간 발효한 술로 이용익 선생이 평생 쌓은 양조 기술과 비전으로 완성한 브랜디다. 지역 특산물로 만든 평범한 토속주를 떠올리던 미식가들이 신례명주의 비범한 맛에 들썩거리는 건 당연한 결과일 터다.






“진로는 1970년대 초반부터 소주 이후의 시대를 고민했어요.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위스키 양조장으로 연수를 많이 다녔고요. 내가 혜택을 많이 받은 셈이지. 당시 수입산 위스키 원액을 블렌딩한 에릭사, JR, 길벗은 다 망했지만 VIP, 임페리얼은 꽤 성공적이었죠.” 국산 위스키의 황금기였다. 화려한 빛깔의 값비싼 외국 술을 향한 사람들의 호기심은 컸고, 거실 선반에 두기에도 근사했다. 정부가 88 서울올림픽과 86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국내 주류업 체 세 곳에 국산 위스키 제조 면허를 발급하면서 진로위스키는 1983년 3월 국산 위스키 원액 공장을 지었다. 이때 선생이 개발한 위스키가 ‘다크호스’다. “스코틀랜드에서 오크통을 잔뜩 들여왔는데 도통 팔리지 않는 겁니다. 창고 에 고스란히 남았는데 1990년대 초 증류식 소주를 제조하면서 방치하던 다크호스 오크통에 저장하게 된 거지. 회사는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난 증류식 소주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했어.” 


그의 예상은 빗나갔고 증류식 소주는 1만 개의 오크통 안에 재고로 남았다. 그렇게 10년 이상 방치됐는데 그사이 숙성된 원액으로 ‘일품진로’가 탄생했다. 지금은 원액 고갈로 생산을 멈춘 터라 웃돈을 주고라도 구매하길 원하는 마니아들이 있을 만큼 많은 사랑을 받는다. “안 팔리니까 오래 저장한 거야. 10년간 저장하고 열어보니 맛이 좋은 거지. 시간의 맛은 따라올 수가 없어요.”


이용익 선생의 증류식 소주를 보는 선견지명이 증명된 셈이다. “예측을 잘해야 해. 주류 시장을 전망하고 매일 대책을 강구하면서 얻은 결과야.” 그는 여러 나라에서 배운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조의 합리적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선배들은 술을 손바닥에 비벼 냄새를 맡으며 눈대중으로 품질 검사를 하는데, 해외에서는 정밀한 분석치를 요구하는 거야. 분석 기계를 사들여 냄새와 도수, 수십 가지 성분 등을 정밀하게 알아냈지.” 그는 지역 양조장에서 만든 술의 맛이 일정하지 않고 쉽게 변질하는 원인도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양조는 과학이거든.” 신례리 1백40여 농가의 감귤을 수매해 양조하는 시트러스도 마찬가지. 누구나 인정하는 고품질의 신례명주 생산은 경험에서 배운 그의 과학적 접근이 있기에 가능했다.


주류 연구소에서 오로지 술을 탐구하고 개발하던 시기에는 늘 동료 20여 명과 함께였지만, 시트러스에서는 그를 포함한 직원 3명이 전부다. 양조부터 기계 관리까지 모두 그의 몫이다. 오랜 시간 한길을 걸었지만 흔들림 없는 일상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1949년 6월에 태어난 소띠라 일이 많은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일을 또 주기 마련이지. 본의 아니게 일을 많이 하게 된 거야. 41년째 한집에서 살았고, 이직한 적도 없지. 뭘 바꾸고 그러는 성격이 못 돼. 일을 오래 하려면 건강한 습관이 제일 중요해. 나는 삐쩍 말랐지만 4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새벽 4시 50분에 일어나 산을 올라요. 3시간 걸려. 농촌 출신이라 부지런하고 규칙적으로 살아. 20년간 테니스도 쳤지. 그런 습관이 일상을 무탈하게 만들어.” 그런데도 제주에서의 삶은 많은 노력이 따른다. 기계가 고장나면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고, 쓸 만한 인력을 구하는 일은 포기한 지 오래다. “버티고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라산을 60차례 올랐어요. 제주 올레길 전체를 다섯 번 걸으면서 버티는 거야. 한라산에 오르기 전날 맥주를 냉동실에 꽁꽁 얼려 가져가지. 아침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정상에 올라 갈증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그걸 마셔. 그 기쁨이 엄청나.”






회사는 운영 초기에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행히 매출 성장 속도가 빠르다. 매년 2배 이상 오르는 판매율로 감귤주의 긍정적 미래를 내다본다. “주류 연구소에서 오랜 세월 근무한 덕분에 와인부터 위스키, 증류식 소주, 맥주 등 만들어보지 않은 술이 없지요. 대부분의 주류를 제조하고 품질 관리를 해온 사람이니 나만큼 양조 경험이 많은 사람도 없을 거요. 그런 풍부한 경험은 오로지 시간이 만드는 거예요. 그 덕분에 제품 분석 의뢰나 쓸데없는 설비에 과도한 비용을 들이는 실수가 사라졌죠. 양조자로서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으니 보람도 큽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한라산 꼭대기로 가서 뒤집힐 거요.”


그의 책상엔 한창 번역 작업 중인 와인 서적이 놓여 있다. 국내에 턱없이 부족한 주류 전문 서적을 번역하고 과학적 양조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 현재 그의 화두다. 더불어 프랑스어로 통용되는 전문용어를 우리말로 바꿔 정착시키는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의 분야를 부단히 탐구하는 방법밖에 없지.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깊이 있게 추적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해. 하기 싫다고 안 해버리면 인생이 재미없고 발전도 없어요.”


스코틀랜드 사람에게 위스키는 서늘하고 축축한 기후, 고단한 삶의 위로였다. 이용익 선생에게 양조란 개인의 탐구와 창의의 수단이자 흔들림 없는 일상을 유지하는 삶의 루틴이 되었다. 그의 탐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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