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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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친구

나만의 볼펜이거나 혹은 모두의 볼펜이거나. 모나미는 모두의 볼펜이 되는 쪽을 선택했고

지금은 ‘우리나라 볼펜’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브랜드가 됐다. 



서울만의 현상일 수도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거리의 모습이 바뀌는 것이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속담이 무색할 정도다. 한때 우리나라의 홍보 캐치프레이즈였던 ‘다이내믹 코리아’는 아주 적절한 묘사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60년 동안 디자인이 바뀌지 않은 제품이 있다. 게다가 한 번만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도 안 써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모두에게 친숙한 물건이다. ‘다들 집에 한두 개쯤 굴러다니잖아’라고 말할 때 그 한두 개에 해당할 수 있는 물건, 바로 ‘모나미 153’ 볼펜이다. 흰색과 검은색의 단순한 조합. 이 덕분에 요즘은 이 두 가지 색상만으로 심플하게 입은 옷차림을 가리켜 ‘모나미 룩’ 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로 모나미 153은 소박하지만 뚜렷한 인상을 지녔다. 지금도 하루에 20만 개 이상 생산하는 이 볼펜이 개발된 것은 1963년이다. 그사이 어떤 특별한 브랜드 스토리나 마케팅 없이 우리나라 대표 상품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됐다. 국민 브랜드를 내세우지 않아도 당연하게 모나미를 우리 것으로 떠올리는 것은 고정관념에 가깝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를 통한 데이터 입력이 일반화되고,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가 취미의 영역으로 옮겨갈 만큼 필기구 시장이 크게 위축되는 등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모나미가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나미가 이어온 지난 시간에 대해 듣다 보면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모나미가 만든 153 볼펜을 쓰던 사람들이 다시 지금의 모나미를 만든 이야기를 신동호 모나미 마케팅 팀장에게 들었다. 


필기구 제조의 핵심 중 하나가 화학 기술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모나미는 1960년에 광신화학공업사란 이름으로 출발한 회사다. 경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로, 당시는 제품을 만들어 내보내기 쉬운 산업구조를 가진 시대였다. 여러 가지 색의 물감과 크레파스를 제조했는데 이때 화학 기술이 중요하다. 이후, 창업자 송삼석 회장이 1년 정도 기술 개발을 거쳐 팁(볼펜 끝을 팁이라고 부른다)을 개발해 탄생한 것이 모나미 153 볼펜이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는 펜대에 펜촉을 끼워서 잉크를 묻혀 필기구로 사용했던 터라 153 볼펜이 나오면서 필기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기구 사용이 점차 줄어드는 시대적 변화는 모나미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2000년대 들어 출산율 감소와 함께 필기구를 사용하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문구 시장 전체가 축소됐다. 학생 개인이 준비하던 수업 준비물도 학교에서 일괄 공급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소상인들이 학교 앞에서 운영하던 문방구의 폐업이 이어졌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대형 서점의 핫트랙스 같은 채널을 이용하면서 문구 시장이 어려워졌고, 대신 오피스플러스나 오피스디포 같은 대형 오피스 문구 체인이 아파트 단지나 학원가에 진출하면서 시장 상황이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제조 회사지만 유통 부문을 키우기 위해 모나미 스테이션이란 프랜차이즈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 두지 못하고 현재는 유지, 관리만 하는 중이다. 다른 활로 확보의 필요성을 느껴 고급화 전략을 도입해보기로 했다. 그것이 2014년이다.





2014년은 모나미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해나 다름없다. 당시 어떤 일이 있었나? 저가 제품으로 알려져 있던 모나미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해가 2014년이다. 매출이 감소하고 시장에 대한 전망도 긍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제품을 프리미엄화하기로 한 것이다. 브랜드 파워가 있지만 한 자루에 3백50원이라는 저가에 팔리던 모나미 153 볼펜을 금속으로 제작해 2만원에 판매했다. 과연 팔릴 수 있을지 우려와 반대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출시 한 시간만에 1만 세트가 모두 팔렸다. 모나미라는 브랜드 가치를 우리 스스로 확인하는 계기이자 모나미의 본질에 집중하는 기회가 됐다.


리미티드 에디션은 그 이전부터 해외 프리미엄 브랜드 등에서 시도하던 방법인데, 모나미의 시도가 특별히 큰 반응을 얻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잘 알려진 워터맨이나 몽블랑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는 시장 자체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소장가치를 부여해 판매를 촉진한다. 프리미엄 엔트리 브랜드인 라미 역시 색상이나 소재, 마감 등 후가공을 통해 다양한 에디션을 만드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1천원 이하 제품만 만들던 모나미가 금속으로 만든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한다는 점을 신기하고 재미있게 바라보는 소비자가 많았다. 그 점이 주효했다고 본다. 플라스틱 사출이 아닌 금속을 소재로 가공하면서 그 전에 다루지 않던 재료라는 점에서 노하우를 축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여러 가지 시리즈를 만들고 만년필까지 라인업을 구축하면서 브랜드 가치를 한 단계 높이는 출발점이 됐다.


모나미의 본질은 필기구를 만드는 회사다. 의외의 장면에서 모나미를 만나게 된다. 새로운 설비나 투자를 할 수 없는 시장 상황이라면 우리가 가진 기술력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모나미는 화학공업 기술을 가진 회사로 출발한 만큼 잉크의 조성과 활용 기술을 갖고 있다. 그 점을 바탕으로 도전한 것이 산업용 마커 시장이다. 다양한 형태의 표면에 쓸 수 있는 마커를 개발했다. 주방에서 냉장고 보관 용기의 젖은 표면에 내용물에 관한 메모를 쓰고 주방 세제로 쉽게 지울 수 있는 ‘키친 마카Kitchen Marker’ 같은 것이 생활 마커라는 테마로 개발한 제품이다. 새벽의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상인들이 생선을 경매한 상자 위에 크레파스를 녹여서 표기하는 데서 착안해 ‘웻 서피스Wet Surface’ 마커를 개발했는데, 물속에서도 필기가 가능하다. 항공이나 선박 등을 도장할 때 필요한 부분에 마킹할 수 있도록 성분을 조정한 산업용 마커도 있다. ‘스킬 마카’라는 제품은 자동차 제조사에서 도장한 면에 메모가 가능하도록 개발한 마커로, 자동차 제조 과정에서 사용하는 알칼리수에 자연스럽게 지워지는 제품이다. 병원에서 환자 몸에 수술 부위를 표시할 때도 우리가 만든 의료용 마커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문구 시장의 침체를 극복할 방안을 찾아야 했을 텐데 모나미의 선택은 무엇이었나? 소비자를 관찰하는 디자인 싱킹design thinking을 시도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고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에서 답을 찾았다. 소비자에게 경험의 가치를 제공하고 싶었는데 추가 투자 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찾다가 자신만의 에디션으로 커스터마이징하고 싶어 하는 니즈를 읽었다. 그래서 완제품 대신 80%만 완성한 제품을 부품 상태로 판매해 구매자가 직접 조립할 수 있게 했다. 분해된 상태로 색상만 여러 가지로 추가했는데 정작 소비자들은 조립 과정을 놀이처럼 즐기고 재미있어 했다. 그래서 사무용으로 판매하지 않고 에버랜드 같은 놀이공원의 선물용품으로 판매 전략을 짰다.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시장인 선물 시장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또 그동안 필기구로만 인식하던 제품을 컬러링이나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법도 제안하고 있다. 발상을 바꾼 것이다. 1970년부터 생산하고 있는 프러스펜이 그 예다. ‘프러스펜 3000’은 꾸준히 판매되는 제품이지만 사무용 필기구에 불과했다. 그런데 사용자들이 이 프러스펜으로 수채화를 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에 번지는 수성 잉크의 특성을 소비자들이 자신의 필요에 맞게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 역시 수성 잉크의 단점으로 인식하던 번지는 특성을 장점으로 보게 됐다.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고 곧장 기존의 다섯 가지 색상에서 36색으로 확대해 제품을 출시했고, 출시 직후 일주일 만에 1만7천 세트가 팔리는 성과를 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회사 내부에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영상 기획자와 촬영 제작자를 뽑아서 콘텐츠를 제작하고 유튜브나 SNS를 통해 활용법을 알린다. 새 제품을 개발하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쓰임과 사용법이 매출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아날로그 제품인 필기구를 디지털 채널로 마케팅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과거에는 이런 채널을 구축하기도 활용하기도 어려웠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SNS를 통해 상품에 대한 반응도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소비자 채널에 직접 영업하기보다 유통사를 통해 영업하던 회사라 그 점이 특히 크게 다가온다. 최근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 회사 제품에 높은 충성도를 보여준 ‘문구 덕후’ 고객 1백53명을 선발해 ‘모나미 펜클럽’이란 이름의 자문단으로 운영했다. 이분들에게는 절대 구할 수 없는 리미티드 에디션을 제작해 리워드 형태로 제공하고 이들에게 얻은 아이디어를 제품 개발에 참고했다. 재밌는 사례도 있다. 독립 서체 디자이너 팀인 ‘양장점’에서 펜글씨에 기반한 서체를 개발해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샤프, 볼펜, 네임펜, 매직펜 이렇게 네 가지 펜으로 글씨를 썼을 때를 가정한 서체인데, 볼펜의 경우 누가 봐도 모나미 153으로 쓴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이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독려하기 위해 리워드 상품으로 협찬한 적이 있다. 이런 에피소드가 바로 모나미가 60년 동안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디자인만 해서 제조사에 하청을 준 제품으로 판매를 하는 여타 다른 문구 브랜드와 모나미가 다른 지점이다. 


리미티드 에디션과 프리미엄 라인업으로 브랜드의 가치를 올렸다. 하지만 필기구의 미래는 여전히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모나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지금은 우리가 단순히 필기구를 제조, 판매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낼 때라고 본다. 모나미 컨셉트 스토어를 열어 다양한 컨셉트의 전시 형태로 소비자가 참여하게 하고 백화점의 남성복 매장에 모나미 스토어를 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해외의 정통성 있는 브랜드 제품을 들여와 컨셉트 스토어에 함께 진열하고 판매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모나미는 문구 회사가 아니라 소비자에게 문구의 본질에 입각한 가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재밌는 기업으로 변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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