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으로 살리는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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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으로 살리는 동네

<누들로드>와 <요리인류>로 음식과 문화를 접목한 다큐멘터리 세계를 일군 이욱정 PD가

이번에는 도시재생 사업에 참여한다. 도시락을 만들어 동네를 살려보겠다는 계획이다.



올봄 짧막하지만 흥미로운 뉴스가 눈에 띄었다. 서울시가 ㈜KBS요리인류와 ‘요리를 통한 도시재생 프로젝트’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한다는 내용. ㈜KBS요리인류는 요리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이욱정 PD가 만든 KBS 사내 벤처회사다. 그러니까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프로듀서가 도시를 재생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융합이란 단어를 떠올렸지만 그러기엔 둘 사이의 간극이 무척 컸다.

“14, 15년 전에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취재해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유럽은 도시 공동화 현상을 40~50년 전부터 겪기 시작했죠. 볼로냐에서는 그때 이미 도심에 방치됐던 도살장이나 밀가루 공장, 창고 따위를 개조해 문화시설로 재생하는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어요.”

1백~1백50년 된 벽돌 건물의 벽체를 살리며 안을 바꾸는, 기술적으로도 어렵지만 경제적으로도 손해인 일을 하는 이유를 묻자 당시 건축가의 대답은 이러했다. ‘집은 기억의 총합이고, 우리 기억을 하루아침에 삭제할 수는 없다.’

우리의 도시도 나이를 먹고 비로소 도시재생 사업의 시기에 들어섰다. 서울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도시재생 사업을 보며 이욱정 PD가 관심을 가진 것은 도시에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요소다. 거기에 음식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문화와 결합한 음식 체험이에요. 도심의 오래된 공간을 재생해 미술관 같은 문화 공간을 만들면 사람들이 한두 번은 오겠지만 그들을 매일 오게 하려면 먹고 마시는 것, 식음료가 중요해요. 푸드 마켓이 좋은 예죠. 끊임없이 사람들로 북적이잖아요. 도시, 동네 재생에는 사람들이 계속 유입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의 계획을 정리해 서울시에 제안했고 요리를 통한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서울로 주변 오래된 동네 몇 곳의 낡은 집을 서울시에서 매입해 ‘앵커 시설’로 정하고 문화적 아지트로 레노베이션 중이다. 공간의 중심에는 쿠킹 스튜디오가 있다. 서계동, 회현동, 청파동 등 여덟 군데 중 두 군데가 식음료 중심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그 쿠킹 스튜디오에서 음식을 만들어 팔게 한다는 계획이다.


“40대 이상의 여성과 은퇴한 남성 주민들이 갑자기 바리스타가 돼 감각 있는 커피숍을 운영하는 건 불가능하죠. 그래서 일본의 기차역에서 파는 도시락 ‘에키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동네 도시락을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지역의 식재료나 전통적인 향토 요리를 응용해 특색 있게 만든 에키벤처럼 동네 특성을 담은 도시락이죠.”

지역색이 구별되지 않는 좁은 범위의 동네마다 차별성을 갖게 하기 위한 장치로 스토리를 꺼내 들었다.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레시피를 구술과 생애사를 통해 찾아내자는 것이다. 가령, 서계동 어느 할머니의 멸치조림이나 청파동 아주머니의 달걀말이 같은 것을 찾아서 스토리를 발굴하고 셰프나 디자이너 등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해 메뉴와 포장을 다듬어 상품화하자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다.


“주로 집을 레노베이션하기 때문에 앵커 시설이 식당을 운영할 만큼 공간이 충분하지 않고 위치상으로도 사람들이 찾아오기 어려울 수 있으니 도시락이 좋은 형태죠. 배달 앱 회사를 사회 기여 차원에서 참여하게 하면 유통까지 해결할 수 있고요. 잘 진행돼 서울 도시락 지도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면 각 앵커를 찾아다니며 도시락을 먹어볼 수 있고, 그런 수익 구조를 갖추어야 앵커가 문화적 아지트로 자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검은벽돌집이라 이름 붙인 회현동의 앵커 시설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설계한 민현준 건축가가, 청파동의 청파언덕집은 김이홍 건축가가 맡아서 베이커리 북카페로 변신시키는 중이다. 그사이 서계동 주민 가운데 4명의 지원자를 받아 도시락연구회라는 모임을 발족하고 요리 연습과 레시피 개발을 진행 중이며 이 모든 과정은 도시재생 관련 다큐멘터리로 제작된다.


“최근 뉴욕과 런던, 독일 여러 도시의 도시재생 사례를 취재하고 왔는데 도시마다 그 안에 동네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서울에 우리가 생각하는 동네라는 개념의 공동체, 지역사회, 로컬 커뮤니티가 과연 존재하는가 자문하니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이 나오더군요. 심지어 뉴욕처럼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에서도 사람들이 자신이 브루클린 출신인지 첼시 출신인지 브롱스 출신인지 구분해서 얘기하고, 동네마다 다른 색깔과 특색을 지닌 데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죠. 물론 우리는 그 도시들에 비해 산업화, 도시화가 급격히 이뤄졌기 때문에 도시가 아이덴티티를 갖지 못한 것이지만요. 우리에게는 다른 모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시재생의 핵심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다. 공간 재생을 통해 사회적 관계와 동네를 재생해야 하는데 이전에 존재했다고 믿어지는 대동 세상, 이상적인 민중 공동체 같은 것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복원할 수도 없다.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나저나, 처음 가졌던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보통은 건축을 하거나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참여하고 시도하는 도시재생 사업에 르 코르동 블루에서 요리를 공부한 다큐멘터리 연출자가 참여한 이유가 무엇일까?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가상의 영상물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공간에서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해요. 아마존만 해도 오프라인 서점을 열고, 수많은 브랜드가 그 브랜드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잖아요. 인간은 디지털로 존재하지 않죠. 뼈와 살을 가진 물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만지고 먹고 냄새 맡고 얘기 나누는 것을 더 원해요.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이 발전하고 가만히 앉아서 세계를 만나고 얼굴을 보며 소통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 장소에 직접 가보고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서 밥 먹고 차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해요. 본능적으로 당연한 거죠. 그래서 도시재생 과정을 하나의 다큐멘터리로 만들면서 실제로 그런 공간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욱정 PD의 도시재생 프로젝트는 공간이 완성되는 올해 12월에 시점이 맞춰져 있다. 그때가 되면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모여서 먹고 마시며 얘기 나누는 공간이 동네를 살리는 광경을 모니터와 TV 화면이 아니라 실제로 목격하게 될 것이다. 동네에서 실제로 구현될 다큐멘터리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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