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한 동네를 만드는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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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한 동네를 만드는 실험

젊은 건축가들이 오래된 후암동에서 펼치는 마을 재생.



지난봄 가장 화제를 모은 드라마는 단연 <나의 아저씨>(tvN)다. 드라마의 주인공 동훈이 사는 허름한 동네에는 ‘정희네’라는 식당이 나온다. 주인공과 친구들은 다들 퇴근길에 이곳에 모여 한잔 걸치고 삶의 무게를 서로 나눈다. 성공한 인생 하나 없는 동네 아저씨들이 모인 그곳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던 어린 ‘지안’이 등장하고 아저씨들은 아재 개그나 던지는데 거기에 묘하게 배려와 보살핌이 담겨 있다. 지안이 그 동네를 떠날 때 했다는 마지막 말을 식당 주인 정희가 동훈에게 전한다. “이 동네가 좋았대.”

인생을 먼저 산 사람이 보여주는 관심과 염려, 하지만 상대의 방어선을 넘지 않는 태도와 배려, 무관심한 척 놓지 않는 사려 깊은 관심. 정희네 식당이 있는 동네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풍경은 그 자체로 위로와 안식이지만 아쉽게도 동훈을 비롯한 아저씨들, 동네 어른들이 젊은 지안을 챙기는 모습은 과거에나 존재했다고 전해질 뿐이다.


2년 전 후암동에 자리 잡은 도시공감협동조합 건축사사무소(이하 도시공감)의 젊은 건축가들은 어쩌면 현실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동훈과 지안의 동네를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굴곡진 언덕 위로 이어지는 적산가옥과 문화주택 사이로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법한 좁은 골목길이 얽혀 있는 후암동에 공유 공간을 만들고, 돈 버는 일도 아닌데 후암동의 집들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후암동의 느린 변화를 시도하는 중이다.

“회사가 어디에 있더라도 프로젝트를 따서 일하면 되니까 사실 지역은 상관없는 셈이에요. 하지만 그러면 우리가 이전에 몸담았던 보통 건축 회사와 다를 것이 없고, 우리도 우리 동네, 우리 지역을 근거지로 거기서 하고 싶은 일을 실험하고 활동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문제의식이 있었죠. 처음에는 종로나 한양도성 주변의 저층 주거지를 찾아 봤는데, 임대료가 맞지 않거나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지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후암동 사진을 보고 왔다가 동네가 마음에 들어서 이곳으로 정하고 사무실을 알아봤죠. 그게 벌써 만 2년이 넘은 일이군요.”


대학원 동기와 함께 진로를 고민하다 도시공감을 시작한 건축가 김준형 팀장 역시 처음 건축을 배울 때 품은 꿈은 다른 대부분의 학생들과 비슷했다.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는 근사한 건축물을 설계하거나 TV와 잡지에 등장하는 집을 짓고 나만의 건축 세계를 구현하는 것. 하지만 학교에서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면서 멋지고 화려한 건축을 실제로 누리고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이후 그는 소수를 위한 건축, 그리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건축이 아니라 마을을 계획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동네 공간과 집을 만들고 계획하는 건축을 하고 싶어졌다. 4년 전 학교 연구실에서 도시공감을 시작해 지금은 후암동에서 6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도시공감이 후암동에서 처음 시작한 프로젝트는 ‘후암가록厚岩家錄’이다. 말 그대로 후암동에 있는 집을 기록하는 일이다. 큰 예산이 필요하지 않고 우선은 ‘몸으로 때우면’ 가능한 일부터 시작했다. 주민들이 신청한 집을 줄자로 실측하고 그걸 도면으로 옮겨 집 안에 걸 수 있는 액자와 대문 밖에 거는 동판을 제작해 선물한다.

“후암동은 과거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탓에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 있어요. 그런 집을 기록으로 남기는 거죠. 주민들이 신청해야 하기때문에 그동안 열네 집 정도를 기록했어요. 2인 1조로 현장에 가서 2, 3시간 측정하고 도면으로 옮기는 데 반나절 정도가 걸려요. 처음에는 이 기록을 어디에 어떻게 쓰자는 생각 없이 아카이빙을 시작했죠.”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고 주인 외에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지만 거기 살았던 사람에게는 많은 추억이 담긴 집을 기록하는 행위는 집과 동네에 대한 애정을 환기하는 작업이 됐다.


그다음으로는 도시공감 사무실의 유휴 공간을 공유하는 시도였다.

“업무 공간과 확실하게 분리돼 있지는 않지만, 저희 회의 공간을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 스페이스 클라우드 같은 플랫폼에 올려서 공간 대여를 했어요. 브로슈어도 만들고 ‘건넛방’이라고 이름 붙여서 홍보도 했지요. 그랬더니 플로리스트가 일주일에 한 번씩 원데이 클래스를 열거나 학생들이 가끔 스터디 모임 장소로 활용하더군요.”

주말에는 출근하지 않는 것이 회사의 원칙이고 기존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니 특별히 돈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회사가 조금 커져 여유가 생기면서 공유 공간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시작했다. ‘후암주방’이 그 첫 프로젝트다. 주방과 식탁이 놓인 공간을 일정 시간 동안 사용료를 받고 임대한다.

“지역에 관한 연구나 수요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결정했어요. 젊은 세대는 보통 주방이 작은 원룸이나 투 룸에서 살기 때문에 친구나 연인을 초대하기도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즐겁게 음식을 만들어 나눌 분위기 있는 공간을 생각했죠. 제가 개인적으로 요리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공간이 작아 큰 비용이 들지는 않았다. 싱크대를 제외한 나머지 인테리어는 모두 팀원들이 직접 했다. 한 달에 15회 정도 대여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서너 달 사이에 예약자가 늘면서 투자 비용을 회수하고 자신감을 얻었다. 두 번째로 시도한 것이 ‘후암서재’다. 집이 좁은 사람들이 자신의 서재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꾸몄다. 늘어나는 1인 가구와 좁아지는 주거 공간 문제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공유 공간이다.






“처음부터 후암동을 대상으로 큰 플랜을 세웠어요. 후암동은 광화문과 을지로로 출근하는 젊은 직장인과 학생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로 1인 가구와 주거 문제에 대한 고민이 많은 곳이죠. 그래서 좁은 집에서 못 하는 일을 다른 공간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할 수 있게 하되 그 공간이 한 동네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매일은 아니어도 필요한 때 그걸 누릴 수 있으면 동네가 조금 살 만해지고, 그러면 동네에 정을 더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이상적인 생각이라는 건 잘 알지만 후암동이란 동네에서 이런 공유 공간을 계속 늘려나가는 것이 도시공감이 하고 싶은 실험 중 하나다. 명확하진 않지만 주방과 서재에 이어 건조까지 가능한 셀프 세탁소와 목욕탕에 잘 가지 않는 요즘 세대가 작은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스파도 구상 중이다.


동네 안에 여러 공간을 만들고 여럿이 움직이지만 도시공감의 움직임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무슨무슨길’처럼 기세등등하고 위압적인 느낌도 없다. 이에 대해 김준형 건축가는 ‘느슨한 관계’라는 표현을 쓴다.

“아주 적극적으로 동네 주민들과 교류하는 건 아니지만 느슨한 관계는 유지하고 있어요. 과거처럼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시시콜콜 알아야 동네라 할 만한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거든요. 저 역시 젊은 세대라 그런 건 부담스러워요. 길 가다 아는 얼굴을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하며 지나가고, 오랜만에 보면 안부를 묻는 정도의 대화를 잠깐 나누는, 그런 느슨한 관계만 유지해도 큰일이 있거나 할 때 서로 외면하지 않지 않을까요? 그런 관계가 마을에서 만들어지고 동시에 서로의 독립된 생활은 지켜주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빈 창고였던 낡은 공간을 사무실로 만들 때부터 궁금해하던 동네 주민들이 카페인 줄 알고 들어오면 커피 한 잔 내어주며 얘기 나누고, 그러다 동네 엄마들이 공동체 활동 지원 신청에 함께 해달라고 할 때도 마다하지 않고 같이 밥먹고 교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연말에는 작은 공동체 모임들이 후암동주민센터에서 모이는 소소한 파티에도 참여하면서 ‘전공’을 살려 모임 장소를 꾸미는 데 힘을 보탰다. 그 덕분에 도시공감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이 동네에 와서 작당하는 청년들이 아니란 사실을 주민들도 알게 됐다. 하지만 도시공감은 늘 스스로 경계한다.

“이런 잡지에 저희 인터뷰 기사가 실리거나 저희가 강연회 같은 데 가서 활동을 소개하고 동네를 알리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사람들이 동네를 찾아오는 일이 많아지면서 동네를 알리는 활동이 자칫 젠트리피케이션을 불러오는 것 아닌가 하는 견제나 우려는 늘 하고 있어요. 지인들은 ‘도시공감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너희는 성공한 거다’라고 농담을 하지만요.”

후암동이 알려지면서 건물 임대료가 높아지고 있지만 다행히 연남동이나 경리단길처럼 변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유행이 지나갈 때까지 잘 버티면 그때는 도시공감이 이 동네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후암가록의 기록을 전시하면서 그동안 쌓은 데이터를 살피다 훨씬 더 좋은 자료가 될 텐데 아직 거기까지 못 이뤘다는 한계를 깨닫고 자료를 더 정교하게 만들고 이 기록을 상설 전시할 수 있는 공유 전시 공간을 후암가록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서 업데이트하는 더 재밌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도시재생이란 말이 일반인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 되고, 때마침 저희도 관련한 일을 하면서 빚지지 않고 회사를 운영하게 됐지만, 뜻을 같이하고 함께 고민하는 동료들이 있어서 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앞서 언급한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이 ‘이 동네가 좋았다’고 했다고 동훈에게 전하며 정희가 덧붙인 한 마디가 있다. “그런데 그 말이 네가 좋았다는 말로 들리더라.”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이 좋아지는 동네. 그것이 어쩌면 도시공감의 건축가들이 이미 이뤄가고 있는 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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