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기 위한 기록 맛의 방주, 김원일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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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 위한 기록
맛의 방주, 김원일 사무총장

단순히 특정 식재료를 찾아 먹는 것만으로 사라져가는 농산물과 식재료를 살릴 수 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먹거리를 방주에 채워 넣는 일.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슬로푸드 slow food는 패스트푸드 fast food에 대항하기 위한 개념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이 말은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시작은 1986년이다. 미국의 패스트푸드 업체인 맥도날드가 이탈리아 로마의 스페인 광장에 매장을 열자 카를로 페트리니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맥도날드 개업 반대 운동을 펼쳤다. 음식을 표준화하고 전통 음식을 소멸시키는 패스트푸드점 진출에 대항하는 운동이었다. 슬로푸드는 이 운동의 이름이다.

슬로푸드 운동은 음식보다는 현대 문명의 속도에 대한 대안 운동이다. 이 배경에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현대 음식에 대한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의 물결에 각 나라의 음식 문화가 사라지고 획일화되는 데 문제를 제기하고 지역의 고유성, 지역의 문화를 지키자는 취지다. 환경운동과 연결되는 이유다.


미국 대도시에서 판매되는 농산물이 산지에서 평균 2414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비싼 연료비를 소비하며 운반되는 것에 반대해 거주 지역 반경 100마일 160킬로미터 이내에서 생산된 먹거리를 선택해 먹자는 미국의 ‘100마일 운동’이나 유통 비용을 절감하고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한다고 보는 일본의 ‘지산지소 地産地消 운동’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토불이와 다르지 않다. ‘맛의 방주 프로젝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라질 위험에 처한 농산물과 식재료를 기록하고 알려서 지켜내자는 움직임이다. 슬로푸드협회 한국지부의 김원일 사무총장은 2013년부터 이 맛의 방주에 우리 식재료와 음식을 승선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다.


“맛의 방주는 고유한 음식 문화를 나라별로 또는 함께 연대해서 지켜나가기 위한 프로젝트예요. 한마디로 ‘기록하는 프로젝트’지요. 온라인 카탈로그를 만들어서 언제든지 농산물과 식재료를 검색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국제협회 홈페이지에서 검색할 수 있는데 세계적으로 4천7백여 종이 등재돼 있어요. 우리나라는 현재 93종이 등록돼 있고 심사 중인 품목이 10여 종이라 곧 1백 종이 넘을 전망이에요.”

맛의 방주는 식재료를 둘러싼 노아의 방주를 현실에서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고민하는 데서 출발한다. 따라서 기록을 우선하는 이유는 사라지고 있는 데 대한 위기감 때문이다. 1996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013년에 처음 등재했다. 그동안 제주도의 지역 콩인 푸른독새기콩으로 만든 푸른콩장, 진주의 토종밀인 앉은뱅이밀, 연산 화악리에서 키우는 까만 닭인 연산오계, 울릉도에서 자라며 어린순을 삶아 나물로 먹는 섬말나리, 장흥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존재하던 발효 고형차인 돈차 등을 등재했다.


기록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소비의 촉진이다. 많이 소비해야 생산자도 생산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 촉진을 위해서 식재료를 여행 자원으로 보고 접근하고 있기도 하다. 특정 지역에 여행을 가야 맛볼 수 있는 음식이라는 점을 어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록을 출판과 미디어 등에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프로젝트가 알려지자 생산자들이 ‘전에는 사람들이 나를 단순히 농사짓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내가 생산하는 식재료가 맛의 방주에 등재되고 나니 주변에서 나를 문화를 보존하는 사람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뿌듯하다’라고 말한다. 해당 생산자의 행위가 농사나 제조가 아니라 식문화를 보존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게 된 셈이다.

“이전에는 시민들이 생산자에게 하는 말이 ‘이거 얼마예요? 싸게 안 돼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이거 지키느라 정말 애쓰신다’라고 말을 건넨다고 해요. 해당 식재료의 가치와 품격이 올라가는 효과가 있어서, 그 재료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실천하는 행위가 된 것이죠.”






소비자는 곧 공동 생산자다

김원일 사무총장은 대학을 졸업한 후 농사를 짓기 위해 시골로 곧장 내려갔지만 2년 만에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농사야말로 지구 생태계와 식량 주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행위라 생각했는데, 농사는 지극히 현실이었다. 이후 관련 시민단체에서 계속 일하긴 했지만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생각에 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그때 ‘공동 생산자’라는 표현을 접했다.

“시민단체에서 대학생 농식품 탐방이라고 해서 농업과 먹거리를 대학생들에게 알려주는 활동을 했어요. 남북 농업교류 협력 활동도 하고요. 이렇듯 주로 음식과 농업 관련 분야에서 일하다가 국제슬로푸드협회 사무총장이 한국에 와서 연설하는 강연에 참석했는데 그때 ‘여러분이 공동 생산자다’라는 한 마디에 꽂혔어요.”


자부심을 일깨워준 한 마디였다. 내가 한 끼 식사를 책임 있게 선택하는 일이 농사짓는 사람들과 생태계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자각하고 계몽할 수 있으면 의미 있겠다는 생각으로 ‘한국 슬로푸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 슬로푸드 네트워크에서 중점적으로 해나가는 일이 바로 ‘맛의 방주 프로젝트’다.

“국제슬로푸드협회 사무총장이 한 말은 우리가 먹는 행위가 곧 농업 행위가 된다는 뜻이에요. 내가 뭘 먹는지가 농업 생산을 결정하는 첫 단계인데 그동안 그걸 몰랐죠. ‘아, 내가 지금까지 대단히 중요한 공동 생산자였다는 사실을 몰랐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은 셈이죠.”


정부가 1986년과 그로부터 15년 뒤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농산물 종류의 86퍼센트가 소멸됐다고 한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식품산업이 대량생산과 대량 유통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전국 어디서나 광범위하게 재배 가능한 품종과 다수확 품종이 개발되었고 이후 특정 지역에서만 나고 자라던 것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소비자가 시장에서 찾지 않는 농산물은 더 이상 어느 곳에서도 심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농산물의 흐름을 알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농부들이 종자를 종묘상에서 사서 쓰지 않고 갈무리해뒀던 것을 썼다. 그렇게 이어오던 토종 종자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시골 어르신들이 깡통이나 우유갑에 주섬주섬 넣어 아껴뒀다가 때가 되면 심고 키워 또 씨앗을 받곤 했던 종자들을 이제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시행한 조사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던 쌀이 1천8백 종에 달했는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요. 콩도 종자가 대단히 많은데 사람들이 콩을 잘 먹지 않으면서 서리태 정도만 귀에 익어 알고 있지요. 농촌에서는 우리가 아는 만큼 재배하고 나머지는 경제적 가치가 없어서 안 심어요. 물론 정부에서 종자 은행에 보존하고 있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라지는 것이죠.”


맛의 방주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일단 지역 어르신들에게 구두 청취를 먼저 한다. 그다음 그 얘기의 근거를 찾아서 지역 향토지나 군지를 뒤진다. 기록은 많지 않다. 향토사학자를 찾아 설명을 구하기도 한다. 생산자를 찾아가보면 대부분의 스토리가 비슷하다. ‘돈도 안 되는 거 진작 때려치웠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혹은 아버지가 하던 일이라 할 수 없이 그냥 한다’는 것이다. 처음엔 김원일 사무총장이 직접 식재료를 찾아다녔지만 지금은 지역의 슬로푸드협회 회원들이 자원봉사를 한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심사 서류를 서울로 보내오면 두어 달에 한 번씩 요리연구가, 토종 전문가, 종 다양성 연구원 등 전문가로 이뤄진 위원회에서 심사를 한다. 근거나 자료가 부족하면 다시 요청하고 이심의를 통과하면 국제슬로푸드협회로 보낸다. 이 과정을 모두가 무보수로 하는 일이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래도 앉은뱅이밀처럼 맛의 방주에 등재된 후 알려져 생산자와 소비자가 늘어나는 경우가 생기면 보람이 있다고.


“1991년부터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시작됐는데 27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밀 자급률이 불과 1.2퍼센트예요. 수입 밀은 표백제나 방부제가 들어 있어 우리 밀이 더욱 건강한 식재료인데도 여전히 우리 밀 사용이 늘지 않죠. 그런데 2013년에 등재된 후로 우리밀로 빵을 만들거나 칼국수와 국수를 만들어 파는 곳이 많이 늘었어요. 금강밀이나 조경밀, 고소밀 같은 다른 토종밀도 많은데 토종밀 하면 주로 앉은뱅이밀로 알고 있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요.”

산업화하기 어렵거나 생태계의 변화로 오히려 천연기념물처럼 지켜야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모든 농산물과 식재료를 지킬 수는 없기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점은 아쉽다.


맛의 방주에서 맛의 요새로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프레시디아presidiar’라는 이름으로 생산자 지원 프로젝트도 하고 있다. 맛의 방주에 들어간 품목을 생산하는 생산자의 조합 결성을 돕고, 조합이 어떤 생산 가이드라인을 갖고 있는지, 그 생산 가이드라인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려서 소비자의 주머니를 열게 만드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과 단체, 유통 회사와 해당 지역의 연구 기관이 도와주면서 시민운동으로 지지해 프레시디아, 즉 요새를 짜자는 운동이다. “소비자의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활동이에요. 우리가 특정해서 품목을 추천하지는 않아요. 사람들의 철학과 가치관을 바꿔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상품을 특정해서 지지하는 게 잘못된다면 저희 이야기가 신뢰를 잃게 되니까요.”


최근에는 맛의 방주를 음식 교육의 형태로 알리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로 가치를 세울 수는 있지만 실제로 맛을 보고 미각적으로 즐거움을 알지 못하면 생각을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서울혁신파크에 ‘서울식문화혁신플랫폼’을 마련해 ‘가나다 밥상 프로젝트(카카오톡친구에서 맛동 검색)’를 진행 중이다. 맛의 방주에 등재된 식재료를 비롯해 지켜나가야 할 음식 문화에 대한 강의와 시식을 함께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 식당에 가면 메뉴판에 어디에서 온 무슨 식재료로 만든 어떤 음식이라고 적혀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개인의 취향이 이렇게 ‘종’의 단계까지 세분화되고 다양화하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성과 소규모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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